0. 3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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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돌로미티의 모든 길이 이어지는 건 맞는데, 얼마나 가서 이어질지는 모른다...

2) 막연히 괜찮겠지, 하고 걷다가 1시간짜리 트래킹이 8시간짜리로 늘어났다.

3) 경치는 정말 좋았지만, 그걸 위해 다른 모든 걸 포기한 느낌... 다시는 못 하겠다.

1. 꿀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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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글맵이 아닌, 돌로미티 지역 지도를 꼭 챙기자. 도로 구간 및 마을, 산장 방문 계획을 꼼꼼히 세우는 편이 좋다.

2) 리프트가 운행 중인지 여부도 확인해야하지만, 동시에 썸머 시즌 리프트가 맞는지도 확인해야한다.

     겨울 스키 시즌에만 운영하는 리프트도 있는 만큼, 잘못 알고 가면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https://www.dolomitisuperski.com/en/SuperSummer/Discover/Regions/Val-Gardena/Lifts

3) 가능하면 좋은 등산화와 스틱을 꼭 챙겨서 올라가자...

2. 여행기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오르티세이행 350번 버스를 탄다.

어제 걷고 너무 피곤해서 아예 좀 더 푹 자고 8시 28분 버스에 탑승했다.

 

돌로미티 서부 구간을 짧게 다닐 것이라면, 볼차노 / 오르티세이 중 어느 곳에 머무를지 고민이 될 것 같다.

(볼차노에 잡을 경우 볼차노 - 오르티세이의 왕복 2시간 버스 이동이 강제되는 만큼)

 

특히 산행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볼차노로 돌아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볼차노에서 나가는 기차 시간도 있고 하니, 대중교통 이용자라면 볼차노에 머무는 것도 충분히 고려할만한 옵션.

 

나는 이상호 가이드님의 말에 일단 볼차노에 숙소부터 잡고 시작했던지라 이런 고민을 하나도 안 했었다 ㅎㅎ;;

 

오르티세이의 아침.

 

자, 오늘은 이 친구를 타고 올라갈 예정입니다.

오르티세이 버스 정류장을 기준, 세체다와 알페디시우시 리프트는 서로 정반대편에 있습니다.

작은 마을이라, 구글맵만 봐도 쉽게 찾아갈 수 있어요.

 

리프트에서 내려다본 오르티세이.

예쁘긴 한데, 개인적으로 산타 크리스티나와 셀바 마을이 더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렌트카를 통해 차량 이동한다면 산타 크리스티나 쪽에 자리를 잡는 것도 괜찮아보인다.

 

리프트에 내려서 바로 보이는 풍경.

나는 파노라마 촬영을 한 적이 없는데, 구글 포토가 지맘대로 파노라마 사진을 만들어놓는다.

몬가 신기한데 편해... 내가 직접 파노라마 촬영을 하면 흔들려서 사진이 영 이상하기만 하던데.

 

잠깐 슈트루델에 카페라떼 한 잔으로 아침을 맞이하고.

 

다시 한 번 짧은 리프트를 타고 아래로 내려간다

 

compatsch로 가는 길은 리프트를 내려서 뒤로 조금 올라가서, 산장을 끼고 돌아야한다.

 

딱 이 뷰 그대로 걸어가면 되는 건데... 그랬으면 1~2시간의 가벼운 하이킹 후 여유를 즐겼을 텐데...

경치 감상하고 사진 찍으려고 다시 리프트까지 돌아갔다가, 잠시 다른 생각에 빠졌다.

 

리프트 바로 옆의 작은 연못...? 저수지...? 이 친구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아뿔싸.

뒤로 돌아가지 않고 그냥 앞으로 걸어가버렸다...

 

조금 걷다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이미 꽤 걸어와버렸다.

리프트에서 내려다볼 때는 완만한 언덕들로 이루어져있고, 길도 이리저리 서로 엮이는 모습이었으니...

가다보면 돌아갈 수 있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계속 걷기로 했다.

 

걷고

 

또 걷다보니 산이 점점 가까워지는 거 같은데... 이 방향이 아니지 않나...?

 

나란 놈... 사진을 찍어놓고도 방향을 못 찾은 놈...

compatsch로 꺽어야하는데, 자세히 보지 않고 그냥 표지판이 있길래 사진만 찍고 그대로 직진했다.

 

풍경이 워낙 이뻐서 어떻게든 되겠지-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걷다보니 saltria에 도착했다.

이건 예정에 없었는데... 아직 점심도 안 되었고, 여유가 많으니 이왕 온 김에 더 걸어보기로 했다.

 

눈 앞에 보이던 리프트를 타러 왔다.

 

음... 좋아... 아예 반대로 왔다는 건 알겠다...

그래도 지도를 보니 옆의 능선을 따라 걸어 내려가면 저녁 즈음에는 딱 도착할 것 같기도 하고?

 

유모차를 밀고, 아기를 업고 다니는 분들이 많았다.

그 정도면 나 같이 건장한 성인 남성은 쉽게 걸어볼만하겠지?

 

응 아니야... 몇 미터 오르지도 않았는데 녹초가 되어서 산장에 도착했다.

게르만인들은 전투 종족이 맞다... 그들은 아기 때부터 혹독한 자연 속에 내던져진 채 단련하며 성장하는 종족이다...

내 옆에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았을 법한 애기들이 같이 걷고 있다...

 

가볍게 사과 주스 한 잔 하고 다시 출발.

 

어느 곳에 서서 어느 방향을 바라보아도 멋진 풍경.

오... 그런데... 길이 저 끝의 협곡까지 이어진 거 같은데... 내 착각인가...?

 

풍경에 취해서 걷다보니, 진짜 협곡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와 이걸 진짜 넘어가네

 

이상하다... 저 바위산 밑에 사람이 지나가는 것 같은데... 설마 저게 길은 아니겠지...?

 

일단 산장이 눈에 보인다...!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앉으니 산장 직원이 와서 괜찮냐고 물어봤다...

저어기 아랫마을에서부터 왔다고 하니 ??? 하는 표정이었다...

그렇다, 뉴발란스 운동화에 크로스백을 매고 관광객 차림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길을 물어보니, 이 길로 저 바위 사이를 지나 산을 내려가야한다고 했다.

설마? 라고 생각하면 정말 이루어지는 그곳, 상상이 현실이 되는 돌로미티에 어서오세요...

 

조금 전에 저 길을 걸어올라왔네...

 

바위 반대편에는 또다른 풍경이 펼쳐져있다.

 

근데 진짜 한 걸음 잘못 디디면 자갈밭 낭떠러지인데요... 이거 맞나요...

사진을 다시 봐도 손에 땀이 난다.

잠깐 앉아서 심호흡하고 풍경을 보는데,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국 해냈다.

이 길을 내려오며 마주친 모든 사람들은 완벽한 등산 세팅이었고, 내 차림새를 보고 항상 ??? 하는 표정부터 지었다.

네 저도 알아요 후회하고 있어요...

 

완전히 내려와서 돌아보니, 대충 저렇게 내려온 거 같다.

가장 멋있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끔찍하게 살떨리는 구간이었다.

 

좋아, 파노라마 리프트까지 10분...! 저거 타면 바로 다음 리프트 근처까지 내려갈 수 있다고 했어...!

 

5분 차이로 늦어서 문 닫음... 하..................................

 

다시 걷는다...

 

이 리프트를 내가 탔어야하는 건데...!

 

길을 잘못 들지 않았다면, 나는 저 방향에서 편하게 걸어왔겠지...? 8시간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리프트 종료 시간 15분 남기고 간신히 도착했다.

이거 놓쳤으면... 난 진짜 집에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또다시 고군분투를 했어야겠지...?

마지막까지 의지를 가지고 걸어서 겨우 해낼 수 있었다.

 

독일에서 놀러온 부부 분들과 리프트를 함께 타고 내려오면서 잠시 수다.

친구가 이곳에 별장을 가지고 있어서 놀러왔다는데, 남편 분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던 듯 하다.

근데 얘기하다보니... 남편 분은 직접 김치를 담궈먹는다고... 지금도 가져와서 먹고 있다고...

이상하다 나는 김치 안 먹는 한국인인데 저 아저씨는 김치를 직접 담궈먹는 독일인이라고...?

여긴 어떤 세계선이지?

 

무사히 버스를 타고 볼차노로 돌아와서, 밀린 빨래까지 마무리.

 

돌아와서 지도를 확인해보니... 파란색이 원래의 계획, 빨간색이 실제로 걸었던 구간.

 

의도치 않게 굉장한 여정을 마친 하루가 되었다.

정말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순간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굉장히 즐거운 경험이었다.

뭐 정 문제가 있었다면 중간에 산장에서 자고, 다음날 기차를 미루고, 어떻게든 할 수 있었겠지?

 

혼자 다니는 여행의 묘미를 가장 크게 느꼈던 날이 아닌가 싶다.

챙겨야할 사람, 신경써야할 사람이 없으니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도 어떻게든 대처하고 즐길 수 있기도 하고.

 

내일은 이제 산 마리노 공화국으로 떠나는 날이다.

3박 4일은 너무나도 짧은 일정이었고,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다음에 꼭 한 번 다시 와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숙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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